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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번역가님의 "영화 자막 오류" 에 대해

romeo1052 2017. 3. 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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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영화 로건과 핵소고지 등을 번역하신 황석희 번역가님의 글입니다.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것같은 내용이라 퍼옵니다.



원문 출처 :: http://subtitler.net/archives/16323


통의 경우는 번역 작업을 시작할 때 완성된 대본을 가지고 하지만 드물게 미완성 대본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큰 작품일수록 이런 일이 자주 있어요. 후반 작업 중에 대본이 넘어오는 일도 있고, 영상 편집이 완료되지 않았는데 오는 일도 있어서 최초 대본에서 대사가 바뀌거나 삭제되거나 하는 경우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Ver.1 대본으로 번역 작업을 완료하면 1~2주 후 Ver.2 대본이 옵니다. 이때 대사들이 조금 변하는데 대폭 변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 수정된 대사들을 다시 번역하고 누락해야 하는 대사가 있으면 빼고, 이런 작업들을 합니다. 문제는 수정된 부분만 고치면 그만인 게 아니라 파일을 통째로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는 점이에요. 워드로 작업한다면 수정된 부분만 손을 보면 되지만 전용 번역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경우(대개 대형 스튜디오 작품) 파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작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은 Ver.3 정도면 final인데 Ver.4, 5까지 가는 일도 있어요.  마지막에 영상이나 대사 편집이 달라지면 급하게 번역 파일도 수정해 달라고 날아오는 거죠. 난 오늘 마감인 Ver.3를 작업하고 있는데 마치기도 전에 Ver.4가 날아오고, Ver.4를 완성해 가는데 갑자기 Ver.5가 날아오고. 마감날에 이렇게 새로운 파일이 날아오는 경우들이 있어요. 아무래도 실수가 날 가능성이 크죠.

re: 최종

re: 최최종

re: 레알최종

re: 완전진짜최종

쉽게 쓰자면 정신없이 작업하고 있는데 해외에서 위와 같은 메일이 쏟아지는 겁니다……(직장인들은 잘 아실 듯..) 저게 하나 올 때마다 처음부터 다 수정해야 하고요. 처음부터 몇 번을 다시 쓰는 거라 오타가 나기도 쉽고, 기존 대사에서 새 대사로 바뀌었는데 너무 정신없이 바뀌어서 바뀐 대사 중에 못 보고 지나가는 것들도 있고. 대형 스튜디오 작품에서 분명히 듣기엔 A라는 뜻인데 비슷한 뜻도 아니고 완전 다른 F의 뜻의 자막이 나오면 이런 예를 의심해볼 만하죠.

마감이 길다면 업데이트 수정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당장 오늘이 마감인데 수정 도중에 이렇게 해외에서 revised file이 마구 날아오면 답이 안 나와요. 이런 불편은 저만 겪는 게 아니라 전세계 모든 영화번역가들이 겪어요. 자막 올리는 회사의 잘못도 아니고 스튜디오 사정이라 자막 올리는 회사에서도 미안하다고 발 동동 구르는 상황. 관객들이 오역, 오타 지적을 하는 것들 중엔 이런 예가 생각 외로 꽤 돼요. 물론 당연히 번역가의 실수로 오역이나 오타가 나기도 하죠. 그런데 매번, 이건 번역가의 실수, 저건 revised file 탓, 이렇게 나눠서 설명할 순 없어요. 지적이 억울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아마 앞으로도 개선되긴 어려울 거예요. 한 두 회사, 한 두푼이 연관된 프로세스가 아니기 때문에.

 

역가의 실수로 인한 오역의 경우에도 관객들이 조금 더 관대한 태도를 가졌으면 하는 것도 있어요. 한 작품의 자막 수는 보통 1,600개에서 1,800개 정도가 되죠. 한 작품에서 오역 지적이 나오는 건 보통 한두 개예요. 1,800개에서 다섯 개를 틀렸다고 해도 오류율이 0.2%입니다. 이건 지극히 정상이에요. 현존하는 모든 외서 번역문과 외화 자막엔 오역이 존재합니다. 정말 드물게 오역이 없는 작품도 있겠지만 그건 차라리 운이 좋았다고 말해야 해요. 제가 작업한 작품 중에 오역이 없는 작품이 있다면 그 또한 운이 좋았던 거고요. 번역가에게 오역은 필연입니다.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절대 피할 수 없어요. 영어 문장의 난이도를 떠나 아무리 쉬운 문장이라도 오역이 종종 나와요. “중학생도 아니고 어떻게 이걸 몰라?” 하시겠지만 그런 경우는 말씀하신 것처럼 몰라서 틀리는 게 아니에요. 중학생도 알 문장을 틀린 거라면 실수인 거죠. 자막 1,800개를 작업한다면 일주일을 꼬박 집중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놓칠 수도 있어요. 한 30분 집중하고 10문장을 번역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난이도니까요.

번역가들끼린 그런 얘기를 종종 해요. 한 영화에 오역이 5개 내외면 인정한다고. 번역을 업으로 하는 프로들은 오역은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걸 알거든요. 물론 작품 당 오역이 매번 10개씩 나오면 문제가 큰 거죠. 그런 경우는 예외로 치고요.

가끔 그런 얘기를 들어요. “돈 받는 프로가 실수를 하면 되냐.” 물론 원칙적으로는 실수를 하면 안 되죠. 하지만 할 순 있어요. 번역가도 사람이니까. 원칙적으로 하자면 대학생들은 4년 내내 올출석에 학점 4.5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고, 토익은 10년을 봐도 매번 990점이어야 하고, 야구 선수의 타율은 10할이어야 해요. 하지만 학점 4.3을 맞았다고 불량 학생이라고 하지 않고, 토익 980점이라고 영어 못한다고 하지 않고, 타율 8할이라고 퇴출 대상이라고 하진 않아요. 공부 잘하는 학생, 높은 토익 점수, 기적적인 타자죠. 메시라도 패스, 슛 성공률이 100%여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 기준을 위해 노력할 뿐이지.

오역이 한두 개 나왔다고 해서 ‘개쓰레기 같은 자막’이 되는 것도 아니고 번역가가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보통 그런 글이 올라오면 댓글에도 비슷한 말들이 나오죠. “어쩐지 그 자막 후론 이상해서 자막을 안 보고 영화만 봤어요” 같은. 괜찮습니다. 자막을 계속 보시길 추천해요. 오역 하나 나왔다고 전체 자막 질에 크게 문제되지 않아요. 좋은 자막과 나쁜 자막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오역 한두 개가 아니라 번역의 전체적인 흐름이어야 하니까요. 비슷한 예로 가끔 네이버 평점을 보면 모든 영화의 평점을 1점 아니면 10점으로 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이런 극단적인 평가는 합리적인 기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죠.

 

화 자막은 일단 스크린에 올라가면 수정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더욱 오역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책은 개정판을 내면 되니까요. 그래서 제가 블루레이 자막 수정에 열을 올리는 것이기도 해요. 실수가 있었으면 거기서라도 바로 잡으려고. 제가 가장 아끼는 것 중 하나가 ‘밴드오브브라더스’ 자막 파일인데요. 스크린 채널에 나갔던 방송을 제가 번역했는데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라 그 자막 파일들을 7년째 업데이트하고 있어요. 책이나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뭔가 생각나면, 혹은 다시 정주행을 하다가 틀린 것이 보이면 수정을 하죠. 장담하건대 한국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밴드오브브라더스’ 자막은 제가 가지고 있는 자막이에요. 7년을 다듬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마음 먹고 털면 오역이 나올 거예요. 번역가와 오역은 이렇게 지긋지긋한 인연이에요.

“일이 몰려서 실수가 나오나 보다”라고 걱정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번역가 한 명이 1년에 번역할 수 있는 양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거든요. 만약 올해 일이 몰려서 제가 다 하고 싶다고 해도 1년에 할 수 있는 양 이상으론 할 수가 없어요. 저는 팔 네 개, 뇌 두 개가 아니니까요. 번역 외주를 주고 저는 감수만 하는 공장식 번역 회사를 차리지 않는 한, 저는 은퇴할 때까지 지금의 작업량 이상 늘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직배사 일을 독점하는 게 아닐 바에야 수입도 은퇴할 때까지 지금과 똑같…(퇴직할 때까지 과장이라고 상상해보시면 될 거예요)

일이 몰려서 급해서 그런가 보다 하시지만 저한테 마감이 7일이 주어지는 작품이라면, 1년에 다섯 작품 번역하는 번역가에게 가더라도 마감은 7일밖에 줄 수가 없어요. 마감은 번역가의 사정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대개 영화사의 사정에 의해 정해지거든요. 오타나 오역이 나오는 것은 번역, 감수 시스템상의 오류와 번역가의 실수, 단순히 이 두 가지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에요. 저 같은 경우는 덤벙거림도 한몫 하고요.

오역 얘기가 나올 때마다 관객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얘기할 순 없지만 조금 더 관대한 태도를 가져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은 늘 들어요. 제 기준은, 현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소리겠지만 당연히 오역 0%, 오타 0%예요. 아무리 열심히 작업했어도 오타가 보이면 성의 없어 보이고,  오역이 보이면 실력 없어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요. 안 그래도 요새 오타가 종종 나와서 개인적으로도 되게 부끄럽고 화도 많이 나고 그래요. 그래서 지금 하는 것들은 더 매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못 찾는 건 못 찾을 거예요. 다만 성의 없이 작업하지 않는다는 것,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믿어주셨으면 해요. 뭐 증거도 없이 믿어달래… 열심히 결과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종종 오역에 대한 글을 쓰는 건 관객들의 이해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강박증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단 하나의 실수로 온갖 비난과 욕설이 쏟아진다고 불안해하고 있으면 제정신으로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은 없거든요. 출근하듯 정신과에 상담을 가고 항불안제를 끌어안고 사는 수밖에. 정형돈 씨가 무한도전에서 하차할 때 느꼈던 공황장애가 이런 심정에서 시작됐던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스스로에게도 “나도 충분히 실수할 수 있다”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중요한 건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이죠. 번역가가 할 수 있는 건 휴먼에러의 가능성 속에서 오류를 줄이도록 최선을 다하고, 오류가 나왔을 때 반성하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이 이상으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위에는 실컷 징징댔지만 지금도 이메일로 오타, 오역 등 열심히 피드백 보내주시는 많은 관객들께 감사한 마음이에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정말 제 발전에 큰 도움이 돼요. 어차피 제 자막을 보고 평가해주는 분들도 관객들이기 때문에 관객분들에게 징징대고 투정도 부리고 싶은 마음이 가끔 들어요. 어디 징징댈 데가 없는 -_- 앞으로도 오류가 있다면 2차 판권에서라도 최대한 수정되게끔 노력하겠습니다. 피드백을 주실 분들은 http://subtitler.net/contact으로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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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뭔가 영알못이 느끼기에도 오역이나 의역이 심하다고 느껴질때는 영화 전체가 이상해지는것은 아니지만 왠지모를 찝찝한 느낌이 계속 남았어요.
하지만 업계현실이 이런것이고 대사를 번역가들이 임의로 자기 감성을 지나치게 투여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되었으니
앞으로는 납득하고 기분좋게 볼수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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